성숙과 계절
에세이
겨울에는 버티는 게 사역입니다
인도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나는 바닥을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붓고 돌아왔는데, 정작 내 손에 잡히는 열매는 없었다. 사역은 멀어졌고 삶은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때 한 목사님이 정착하는 데 보태라며 5만 원을 건네주셨다. 두어 달 뒤에는 다시 5만 원을 주셨다.
큰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 돈을 기억한다. 형편이 나아진 뒤 받은 축하가 아니라,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나조차 알지 못하던 때 받은 손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잘될 때 찾아온 사람보다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 준 사람을 오래 기억한다.
나는 원래 성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능성이 보이면 속도를 붙이고 싶고, 일이 커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먼저 뛴다. 인도에서도 그랬다. 현지 교회와 청년들을 사랑했고, 내가 가진 것은 아끼지 않고 다 주고 싶었다. 그렇게 봄의 초입부터 여름이 오기 직전까지 달렸는데, 열매가 눈앞에서 터지려는 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나님께 서운했다. 왜 여기까지 하게 하시고, 나는 그다음을 보지 못하게 하십니까.
몇 해가 흐른 뒤 다시 만난 청년들은 내가 알던 모습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리에서 사역하고, 다른 이를 돕고, 가진 것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반가워하고 고마워한 까닭은 성공한 뒤에 내가 찾아갔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열매를 보지 못했을 뿐, 그 시간에 심은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도서는 천하 만사에 때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도, 교회에도, 사역에도 계절이 있다. 어떤 때에는 싹이 돋고 자라는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보인다. 기도한 일이 풀리고, 사람이 모이고, 새로운 일이 연이어 일어난다. 우리는 그런 여름을 좋아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겨울은 다르다. 처음 겨울과 마지막 겨울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애써도 제자리인 것 같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듯한 날도 있다. 끝나는 날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을 더 지치게 한다. 그러나 겨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땅을 다지고, 힘을 모으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는 일이 그때 이루어진다.
잘되는 것과 성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은사가 나타나고 일이 커져도 사람이 저절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능력은 앞서가는데 인격이 따라오지 못하면 서로를 다치게 한다. 많이 알면서도 섬길 줄 모를 수 있다. 반대로 말씀을 붙들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살아 있는 역사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온전하지 않다. 겨울은 어느 한쪽을 없애는 계절이 아니다. 능력에 성품을 붙이고, 말씀에 기대를 되돌려 주며, 치우친 것을 함께 걸을 수 있게 만드는 때다.
성숙은 거창한 말보다 방향의 변화에서 드러난다.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은혜를 받는 일이 시시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받은 은혜가 더는 자기 안에만 머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던 사람이 먼저 한 사람을 알아보고, 위로받고 싶던 사람이 다른 이의 겨울 곁에 앉는다. 은사는 자랑이 아니라 섬김이 되고, 물질은 소유가 아니라 나눔이 된다. 그때 사람은 자란다.
나는 강의에서 이 일을 ‘저점 투자’라고 표현했다. 사람을 손익으로 계산하자는 말이 아니다. 갚을 힘이 없는 사람에게도 시간과 마음과 물질을 내어 주는 믿음을 말하고 싶었다. 내게 5만 원을 두 번 건네주신 목사님은 그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따지지 않으셨다. 내가 아무것도 갚지 못한다 해도 그 일은 이미 귀했다. 사랑은 보답이 확실한 곳만 골라 찾아가지 않는다.
겨울에는 버티는 게 사역이다. 내가 말한 버티기는 아무 생각 없이 한 자리에 매여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억지로 봄을 만들어 내지 않겠다는 믿음에 가깝다. 잠언은 부지런한 사람과 조급한 사람을 나누어 말한다. 둘 다 가만히 있지 않지만 방향이 다르다. 부지런한 사람은 오늘 맡겨진 일을 한다. 조급한 사람은 오늘을 견디지 못해 계절을 건너뛰려 한다.
봄이 언제 오는지는 하나님만 아신다. 내가 떠난 뒤에 싹이 날 수도 있고, 살아 있는 동안 그 열매를 다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심은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가장 추운 때 건넨 작은 도움과 아무 변화가 없어도 계속 드린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남는다.
눈앞의 땅이 오늘도 어제와 같아 보이는가. 그렇다면 성급히 실패라고 이름 붙이지 말자. 어쩌면 지금은 열매를 세는 때가 아니라 땅을 지키는 때인지 모른다. 봄의 날짜는 우리가 정하지 못한다. 우리의 몫은 겨울에도 사랑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겨울에는, 버티는 게 사역이다.
강의 요약
1. 사람과 공동체에는 저마다의 계절이 있습니다
2. 잘되는 것과 성숙하는 것은 다릅니다
3. 겨울에는 보이지 않는 일이 진행됩니다
4. 성숙은 받는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5. 말씀과 능력은 함께 자라야 합니다
6. 가장 힘들 때 곁을 지키는 사랑이 오래 남습니다
7. 부지런함과 조급함을 구별해야 합니다
8. 열매를 직접 보지 못해도 심은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9. 겨울의 사역은 봄을 만들기보다 자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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