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양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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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맞는 말만큼 그 말을 꺼낼 때를 배웁니다

저는 사람을 보면 지금보다 다음 단계를 먼저 보는 편입니다. 가능성이 보이면 빨리 훈련시키고 싶고,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으면 한마디를 더 보탭니다. 좋은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뜻이 늘 좋은 때를 만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역자는 사람마다 다르게 접근할 줄 알아야 합니.

한 사람을 보며 나중에 사역자로 잘 자랄 것 같으니 지금부터 훈련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딱 하루였습니다. 더 잘 섬기려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며 잔소리를 조금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마음을 닫았고, 오랫동안 저와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틀린 말을 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훈련의 언어부터 꺼냈습니다.

아이를 키워보면 단계가 있다는 말을 금방 이해합니다. 갓난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울 때 반응해주고 품어주는 일입니다. 조금 자라 자아가 강해지면 감정을 받아주면서도 한계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같은 사랑이지만 표현은 달라집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존재가 흔들리고 상처가 많은 사람에게는 “괜찮습니다. 사랑받고 있습니다”라는 말부터 필요합니다.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다음 단계의 훈련도 건강하게 받을 수 있습니.

반대로 책임을 맡아야 자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속 먹여주기만 하면 오히려 성장이 멈춥니다. 직접 움직이고, 맡은 일을 감당하고, 실패도 해보아야 합니다. 저 자신에게도 시기가 달랐습니다. A국에 있을 때는 사역하고 움직이는 동안 영성이 자랐습니다. 몇 년 동안 행동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내면이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 뒤 몇 년은 일을 더 벌이는 때가 아니라 속사람을 돌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도 그 시기에 많은 일을 하도록 몰아붙이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린 양을 먹이고, 양을 치고, 다시 먹이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맡겨진 사람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먹임이 먼저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방향과 책임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격려하고, 힘없는 사람은 붙들고, 흐트러진 사람은 권면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필요한 말과 기다림의 길이가 다릅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겨우 머물도록 돕는 교회가 있고, 기초를 가르쳐 성장시키는 교회가 있으며, 성숙한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는 교회가 있습니다. 회복을 맡은 교회를 보고 수준이 낮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땅에서는 오랜 세월 씨를 뿌리고도 눈앞의 열매를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실패한 사역은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같은 사람을 섬기지도 않고, 같은 계절을 지나지도 않습니다.

율법을 가르칠 때도 사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죄를 드러내고,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을 보여주며, 아직 분별이 약한 사람에게 행동의 출발점을 줍니다. 다만 그 출발점을 마지막 목적지로 만들면 문제가 생깁니다. 쉬어야 할 사람에게 더 강한 기준을 들이대고, 책임을 배워야 할 사람에게 계속 괜찮다고만 말하면 둘 다 놓칩니다.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규칙부터 보는 순간, 율법주의가 시작됩니.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을 모세의 모든 조항을 더 철저하게 반복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제사는 예수님의 단번의 제사 안에서 성취되었고, 성전과 레위 지파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이스라엘의 구조를 오늘의 교회에 그대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쓰레기처럼 버리자는 말도 아닙니다. 율법이 가리키던 뜻과 정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새 언약의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십일조도 여기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십일조를 가르치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헌금 자체를 평생 배우지 못할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십일조는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배우는 아주 실제적인 첫 훈련이 됩니다. 기준이 필요한 때에는 기준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가 복음의 마지막 수준은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믿으며 이미 더 넓게 드리고 나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정확히 십 퍼센트를 했는지만 계속 묻는다면,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하고 억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발성은 덜 드려도 된다는 핑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숫자 뒤에 숨지 않고 제 마음과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내놓는 자유입니다.

규칙은 편합니다. 누가 잘하고 있는지 빨리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다른 방식으로 드리고 있다고 말하면 사정을 듣기도 전에 “십일조를 안 한다고요?”라는 반응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정작 복음은 사람의 내면이 새로워지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길을 엽니다. 율법은 유익하지만 생명은 복음 안에 있습니. 외적인 기준은 사람을 보호하고 가르칠 수 있지만, 마음을 새롭게 하는 생명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맞는 말을 하는 것만큼 그 말을 언제 꺼낼지 분별해야 합니다. 사랑이 먼저인 사람에게는 충분히 먹이고, 경계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분명하게 말하고, 성숙한 사람에게는 책임과 자유를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누구를 보내실지는 고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맡겨진 사람 앞에서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먹임입니까, 방향입니까, 기다림입니까. 복음 안에서 사람을 보고, 먹이고, 치며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강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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