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양육
에세이
규칙은 도구이고 사랑이 목적입니다
A국에서 몇 년 동안 같은 청년들을 가르치고 함께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때는 제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 알아들은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삼사 년쯤 지나서야 그 청년들이 말했습니다. “이제 그때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양육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답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 말을 통해 다시 배웠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강의 몇 편만 남긴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고, 웃고, 부딪히고, 기다리면서 마음을 쏟았습니다. 지금 그들 가운데는 교회를 섬기는 사람도 있고, 복음이 드문 곳에서 다음 사람을 돌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 시간을 돌아보면 양육의 성공은 많이 가르쳤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또 다른 사람 곁에 서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규칙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는 주일 예배와 헌금, 말씀 읽기처럼 분명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람에게는 작은 약속 하나가 삶의 방향을 붙들어 줍니다. 그래서 양육자는 때로 또렷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만 그 기준이 마지막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규칙은 도구입니다. 사랑이 목적입니다.고린도전서 8:1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는 말씀도 이 자리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제도를 더 엄격하게 되살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전과 제사, 제사장 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던 목적을 자기 안에서 완성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새 언약 안에서는 무엇이 끝났고 무엇이 이어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반복되는 제사는 끝났지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삶은 이어집니다. 정결 규정의 경계는 끝났지만 거룩을 향한 부르심은 이어집니다. 형식은 끝났고, 그 형식이 가리키던 의미는 지금도 이어집니다.골로새서 2: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형식을 붙잡느라 의미를 잃어버리면, 율법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율법이 가리키는 분을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차이를 사람들 앞에서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죄인과 식사하셨고,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셨고,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 율법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규칙을 지키는 일보다 사람이 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긍휼과 생명을 빼고 남은 규칙은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합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성전과 레위인, 절기와 가난한 사람을 함께 돌보던 이스라엘의 제도였습니다. 해마다 같은 십 퍼센트를 교회에 내는 오늘의 방식과 그대로 겹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십일조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분명한 기준조차 없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무 기준이 없을 때는 동전 하나만 던지고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양육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십 퍼센트를 냈으니 끝났다”는 계산에서, 내 삶 전체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는 고백으로 자라야 합니다. 의무 때문에 겨우 내던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기뻐하게 된다면, 규칙이 관계를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규칙이 신앙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자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미가서 6장에서 하나님은 더 많은 제물과 더 큰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미가서 6:8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율법주의는 자꾸 “이만큼이면 충분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늘 나는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양은 계산할 수 있지만 관계는 계산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이걸 정확히 보여줍니다. 액수가 아니라 마음의 비중이 핵심입니다.마가복음 12:43-44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예수님은 사람을 금액으로 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작은 것을 드려도 그 안에 담긴 신뢰와 사랑을 보셨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값을 치르는 일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마음으로 응답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A국에서는 관계를 설명할 때 ‘주고받음’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좋은 관계는 한쪽이 지시하고 다른 쪽이 의무만 수행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마음을 주고, 사랑을 받고, 받은 사랑에 다시 응답하면서 깊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살아 있다면 그런 움직임이 생깁니다. 억지로 끌려가던 사람이 어느 순간 기쁘게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양육자는 사람을 규칙 앞에 세워 놓고 점수만 매길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사람에게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한지, 아니면 그 기준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야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한 문장으로 가르친 말이 몇 년 뒤 삶의 한복판에서 다시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일도 양육입니다.
양육의 목표는 강의를 오래 기억하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함께한 사람이 하나님을 조금 더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다음 사람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규칙을 잘 통과한 사람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깊이 걷는 사람을 남겨야 합니다.
강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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