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겸손
에세이
제 말이 맞을 때 한 걸음 늦춥니다
외부 업체와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해 메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도 잘됐고, 제가 잡은 계획에 별다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보내고 나니 마음에 걸렸습니다. 대표와 함께 논의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제가 최종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앞서가 버린 것입니다. 결국 대표에게 메일을 한 통 더 보냈습니다. 이런 방향으로 진행하려는데 다른 의견이 있으면 고치겠다고요.
내용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결과도 좋았습니다. 다만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 작은 일이 제게는 오래 남았습니다. 사람이 조심해야 할 때는 자기가 틀렸을 때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 말이 맞고, 제가 더 잘 볼 때 교만은 슬그머니 고개를 듭니다.
일하다 보면 고치고 싶은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왜 저렇게 하는지 답답할 때도 있고, 제가 맡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가 있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과 바꿔야 할 것이 자꾸 보입니다. 실제로 그 판단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일을 제 뜻대로 끌고 갈 권리까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초대받거든 높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내려오는 일보다, 낮은 자리에서 주인의 부름을 받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받는 요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 앞에서는 제가 왜 그토록 높은 자리를 서둘러 찾는지부터 돌아보게 됩니다. 제가 저 자신을 먼저 올려놓지 않아도 하나님은 저를 잊지 않으십니다.베드로전서 5:6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베드로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고 말합니다. 때가 되면 높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조급하게 제 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매번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제게 맡겨진 일을 하고, 문을 여시는 때는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잠언에는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사람이 그 열매를 먹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무를 지키는 일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같은 자리를 오래 살피고, 때가 올 때까지 떠나지 않는 일입니다. 겸손도 그렇게 배워 가는 것인지 모릅니다. 큰일을 차지하려 서두르기보다 지금 맡겨진 나무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입으로 자꾸 자신을 높이면 곁에 있는 이들이 그를 세워 줄 자리가 없어집니다. 남을 낮춰 보는 말, 자신은 이 정도 사람들과 어울릴 수준이 아니라는 말, 자기 공을 빼놓지 않고 알리는 말은 생각보다 오래 남습니다.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전부터 이런 말들에 조금씩 닳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잘하는 사람이 못하는 척한다고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써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제대로 해내고, 필요한 때에는 의견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다만 그 힘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는 살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저를 보게 만드는지, 아니면 함께 일하는 이들이 제 몫을 다하도록 돕는지 말입니다.
교회는 팀워크입니다. 한 사람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도 함께 가는 이들의 호흡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밀어붙이면, 옳은 생각도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리더의 책임과 함께 정한 방향을 존중하고, 제게 맡겨진 범위 안에서 힘을 보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한 번 더 묻고 확인하는 일이 답답해 보여도, 함께 가려면 그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질서라는 말이 질문을 막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리더를 섬긴다는 것은 한 사람을 절대화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결정이 사람을 해치거나 양심을 거스른다면 책임 있게 묻고 말해야 합니다. 겸손은 제 욕심을 내려놓는 일이지, 양심까지 내려놓는 일이 아닙니다. 질문할 줄 아는 용기와 자기 뜻을 밀어붙이지 않는 절제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제가 책임을 맡은 자리에서는 숨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방향을 기다리고 있는데 결정하지 않고 뒤로 빠지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리더라면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며, 그 결과도 감당해야 합니다. 담대함은 자기 크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맡은 책임의 무게를 피하지 않을 뿐입니다.
젊은 사역자에게는 이 구분이 특히 어렵습니다. 설교에 반응이 오고, 사람들의 인정이 따르고, 이전보다 많은 일이 맡겨지면 마음이 쉽게 앞서갑니다. 은사는 빠르게 드러날 수 있지만 성숙은 그렇게 빨리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응이 좋을 때일수록 제 말과 걸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나서는 것이 이 일을 살리는가, 아니면 제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것인가.
다윗은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자기 손으로 사울의 자리를 빼앗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때를 앞당겨도 된다는 허락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은 힘이 없어서 택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힘이 있어도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것이 기다림입니다.
겸손은 작아지는 연기가 아닙니다. 잘하는 것을 못한다고 말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제게 있는 힘을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꺼내야 할 때 꺼내고, 거두어야 할 때 거두는 것. 제가 서야 할 때는 담대히 서고, 다른 사람이 설 때는 그 자리를 흔들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말이 맞다고 여겨질 때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한 번 더 묻고, 한 걸음 늦추십시오. 은사는 힘껏 쓰되 자신이 중심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아도 됩니다. 이 한 가지를 믿으면 낮은 자리에서도 마음이 급해지지 않습니다.
강의 요약
1. 맞는 말에도 순서와 자리가 있습니다
2. 낮은 자리는 하나님의 때를 믿는 자리입니다
3. 교만은 말에서 먼저 드러납니다
4. 은사는 감추지 말고 쓰는 방향을 살펴야 합니다
5. 리더십에는 절제도 필요합니다
6. 질서와 맹목적인 복종은 다릅니다
7. 담대함은 책임지고, 교만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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